어린 시절의 꿈
나는 만화가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겼고,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화실에서, 다 그러고 나서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썩 만족하면서 한참 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나는 미술의 열정을 키웠으나, 12살에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현지 미술 학원의 입시 중심 교육으로 인해 미술을 계속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반대와 전공 난관
대학 진학 시 미술 전공을 희망했으나,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로 영어 전공을 선택했다.
엄마는 그림은 전시회 할 때마다, 예술가에게는 그것이 곧 경력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집에서는 그것을 감당할 경제력이 안된다고도 하셨다.
아빠는 한마디만 하셨다. "그 분야에서 1등할 생각 아니면 시작도 하지 마라."
애초에 실력도 없었기에, 나의 고집은 곧 쉽게 꺾였다.
나의 꿈은 미묘하게 씻겨나가고, 대신 언어와 문학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덕분에 미국으로 힘들게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영어 전공은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했고, 접혀진 꿈에 대한 그리움은 항상 내 마음을 괴롭혔다.
졸업과 두려움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전공을 바꾸려고 시도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나도 참 너무 나 자신을 가족에게 맡겨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주어진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그 결과, 그 해 (우리 학과에서) 졸업할 수 있었던 유학생은 내가 유일했다.
친구들과 부모님은 나보고 "중국어도 잘하고, 이젠 영어도 하니 취업 걱정은 없겠다"라고 하며, 부러워했다.
나는 당시 그 부러움에 상당히 도취해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있으니, 마냥 졸업한 후의 학생의 신분이 더 이상 아니게 될 것에 매우 두려웠다.
성경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았다는 친구를 따라서 같이 공부해 보았으나, 더 답답하기만 했다.
마케팅 인턴부터 정직원
주위 친구들은 졸업을 앞두고, 인턴을 했다.
그때 나는 마케팅 수업이 너무 흥미로웠고, 이론을 실제로 어떻게 경험하고 싶은 욕구가 컸다.
우연히 온라인 마케팅 회사에서 인재를 모집하고 있었고, 나의 중국어 실력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의 실제 상황은 마케팅 경험이 거의 없는 대표가 자신을 대표로 세우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마케팅 수치를 조작했고, 이해가 가지 않는 비윤리적인 일이 많았다.
그 사이에, 나는 인턴에서 정직원으로 전환이 되었다.
어느 날, 마케팅 결과가 나오지 않아 화가 난 고객사가 회사에 직접 찾아왔는데, 대표는 회사가 큰 기업이라고 외부에 말했던 모양이다.
회사 빈 1층과 2층에 임의로 책상을 1배치하고, 일용직 사람들을 고용해서 2시간 동안 앉혀놓기도 했다.
이때 회사에 대한 회의감이 가장 많이 왔던 것 같다.
금융 투자회사
마케팅 회사에 다닐 때, 서적을 여러 권 읽었었는데, 금융 관련한 이야기를 통해 투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우연히 현지 투자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게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성희롱으로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지금도 이 부분은 이력서에 기재하지는 않는다.
가족과의 직업 관점의 충돌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셨지만, 나는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책의 조언 사이에서 갈등이 됐다.
내가 포기한 좋아하는 일은 더 이상 잘하는 일이 아니어서 업으로 삼기가 두려웠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지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한국 대기업 중국 법인: 안정적인 직장
취업의 필요성으로 중국어 능력을 살려 무역회사에 입사한 나.
회사는 한국 대기업의 중국 법인이었고, 중국어가 능통한 한국인재가 필요하여 현지 채용으로 선택되었다.
이 회사에서는 3년 동안 근무했으나, 나의 발전의 느낌이 없어 대체될까 봐 불안했다.
회사는 안정적이었으나, 본사의 결정권, 정치적인 문제와 사내 분열, 그리고 무엇보다 본사가 중국에 대한 지원 감소로 고통받았다.
당시 스트레스를 풀고자 들어간 운동 모임에서 게임회사에서 재직하고 있는 친구를 알게 된다.
게임 회사 및 귀국
이직을 생각하고 있던 찰나, 중국에서 게임 회사에 입사를 고려했지만, 해당 분야의 경험이 부족하고 사회 초년생과 외국인이라는 타이틀은 현지 회사에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결국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국비 교육을 통해 게임 기획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중국어'를 놓을 수 없던 나는 소통이 주 업무인 PM 직무로 작은 회사에 입사하였으나, 게임 회사 대표와의 의견 마찰로 해고당하면서 법적인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의 말에 휩쓸려 결국 소송을 포기하고 다른 이직 시도를 했다.
이로써 한 회사의 경험으로 업계에 대한 섣부른 인상이 심어졌다.
프로그래머
준비 없이 나온 회사에서의 경험은 초조함을 남겼고, 게임 업계에 남아있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소통이 주 업무가 어렵게 느껴졌고, 유료 심리검사 등을 통해 자신의 성향을 재차 확인하는 등 초조함과 방황하는 시기를 보냈다.
게임회사에서 사비로 배웠던 프로그래밍에 재미를 느끼고, 프로그래밍을 배워 백엔드 개발자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취업에서는 팀장이 어느 날 갑자기 런 해버려서, 한 사람에게 회사와 팀원이 사기를 당했다.
나는 이 사회와 맞지 않는 느낌과 우울감이 오면서 회의감이 왔다.
그 외: 중국에서의 경험과 가치 발견
실업 기간 동안 중국도 다녀왔고, 중국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외국인에 대한 행정처리가 불편한 점을 제외하면 음식의 가격이 저렴하고 각종 배달 서비스 및 물류망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어 편리했다.
나중에 중국으로 출장 갈 수 있는 중국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 직업 변동과 자아 탐색의 한계
그와 별개로, 직업을 바꾸면서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어릴 때의 상상과는 다르게 30세가 되면 안정적인 직책에서 삶을 즐기고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다르게 펼쳐졌다.
주변에는 결혼하고 자녀를 둔 친구들이 있어 더욱 손색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과의 교류를 피하게 되고, 자신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회피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어 능력으로 인해 구인 연락이 오는 경우에도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막막한 심경이다.
어렸을 때, 교회에서 앞에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멋있게 느껴졌다. 그들은 모두 "방황" 하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고, 그 당시 나도 무엇인가를 찾아 방황하는 모습이 멋있게 느껴져서 나도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방황의 일환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어릴 적의 순수함을 원망해 보기도 한다.
<끝>
'This is Shien > Adult Career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쏀의 진로] '중국어'를 제외하면 나는 뭘까에 대한 고민 (0) | 2023.12.06 |
---|---|
[쏀의 진로] 부모님의 진로 (1) | 2023.11.20 |
[쏀의 진로] 근래의 부모님과의 마찰 (0) | 2023.11.20 |
[쏀의 진로] 내가 알고 있는 나 (0) | 2023.11.20 |
[쏀의 진로 기록] 첫번째 (0) | 2023.11.20 |